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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 김시습, <이생규장전>-모의고사 기출, 변형 20문제(3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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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2023 수특)

 

이경(二更)쯤 되어 달빛이 희미한 빛을 토하며 들보를 비추었다. 그런데 회랑 끝에서 웬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들려오더니 차츰 가까워졌다. 발걸음 소리가 이생 앞에 이르렀을 때 보니 바로 최 씨였다. 이생은 그녀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나머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하여 목숨을 부지하였소?”

최 씨는 이생의 손을 잡고 한바탕 통곡하더니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본디 양가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어버이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놓기와 바느질에 힘쓰고 시서(詩書)와 인의(仁義)의 방도를 배울 뿐이었습니다. 오로지 규문의 법도만 알았을 뿐 어찌 집 밖의 일을 헤아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당신께서 붉은 살구꽃이 핀 담장 안을 한 번 엿보신 후 제가 스스로 푸른 바다의 구슬을 바쳤지요. 꽃 앞에서 한 번 웃고는 평생의 은혜를 맺었고, 휘장 안에서 다시 만났을 때에는 은정이 백 년을 넘칠 것 같았지요.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슬프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군요. 장차 평생을 함께하려고 하였는데 뜻밖의 횡액을 만나 구덩이에 뒹굴게 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끝까지 짐승 같은 놈에게 몸을 내맡기지 않고 스스로 진흙탕에서 육신이 찢기는 길을 택하였지요. 그건 천성이 저절로 그렇게 한 것이지 인정으로야 차마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답니다.

외진 산골짜기에서 당신과 헤어진 후로 짝을 잃고 홀로 날아가는 새의 신세가 된 것이 너무 한스러웠습니다. 집도 없어지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니 고단한 혼백조차 의지할 곳이 없었지만 절의는 귀중하고 목숨은 가벼우니 쇠잔한 몸뚱이일망정 치욕을 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누가 마디마디 끊어져 재처럼 식어 버린 제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겠습니까? 그저 조각조각 끊어진 썩은 창자만 모아 두었을 뿐, 해골은 들판에 던져졌고 간과 쓸개는 땅바닥에 버려져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요. 가만히 지난날의 즐거움을 헤아려 보기도 하지만 오늘의 근심과 원한만이 마음에 가득 차 버렸습니다.

이제 추연(鄒衍)이 피리를 불어 적막한 골짜기에 봄바람을 일으켰으니 저도 천녀의 혼이 이승으로 돌아왔듯이 이곳으로 돌아오렵니다. 봉래산에서 십이 년 만에 만나자는 약속을 이미 단단히 맺었고, 취굴(聚窟)에서 삼생(三生)의 향이 그윽이 풍겨 나오니 그동안 오래 떨어져 있던 정을 되살려서 옛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아직도 옛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면 저는 끝까지 잘해 보고 싶어요. 당신도 허락하시는 거지요?”

이생은 기쁘고도 감격하여 말하였다.

그건 바로 내가 바라던 바.”

 

 

두 사람은 다정하게 마주 앉아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그러다가 이생이 재산을 얼마나 도적에게 약탈당했는가에 대해 묻자 최 씨가 말하였다.

조금도 잃지 않았어요. 아무 산 아무 골짜기에 묻어 두었답니다.”

이생이 또 물었다.

양가 부모님의 유해는 어디에 있소?”

최 씨가 대답하였다.

아무 곳에 그냥 버려져 있는 상태랍니다.”

두 사람은 그간의 정회를 다 나눈 후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다. 지극한 즐거움이 예전과 같았다.

다음 날 최 씨와 이생은 함께 재물이 묻혀 있다는 곳을 찾아갔다. 과연 금은 여러 덩이와 얼마간의 재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양가 부모님의 유골을 수습한 후 금과 재물을 팔아 각각 오관산 기슭에 합장하였다. 묘소에 나무를 심고 제사를 드려 예를 극진히 갖추었다.

그 뒤 이생은 벼슬을 구하지 않고 최 씨와 함께 살았다. 목숨을 구하고자 달아났던 종들도 다시 스스로 돌아왔다. 이생은 이때부터 인간사에 게을러져서 비록 친척이나 손님들의 길흉사에 하례하고 조문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항상 최 씨와 더불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금실 좋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어느 날 저녁 최 씨가 이생에게 말했다.

세 번이나 좋은 시절을 만났지만,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어그러지기만 하네요. 즐거움이 다하기도 전에 갑자기 슬픈 이별이 닥쳐오니 말이에요.”

그러고는 마침내 오열하기 시작하였다. 이생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오?”

최 씨가 대답하였다.

저승길의 운수는 피할 수가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연분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또 저희가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이 몸을 환생시켜 당신과 지내며 잠시 시름을 잊게 해 주신 것이었어요. 그러나 인간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산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

(중략)

 

 

이생도 슬픔을 걷잡지 못하여 말하였다.

내 차라리 당신과 함께 저세상으로 갈지언정 어찌 무료히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소? 지난번 난리를 겪은 후 친척과 종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해가 들판에 버려져 있을 때 당신이 아니었다면 누가 부모님을 묻어 드릴 수 있었겠소? 옛 성현이 말씀하시기를 어버이 살아 계실 때는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신 후에는 예로써 장사 지내야 한다.’라고 했는데 당신의 천성이 효성스럽고 인정이 두터웠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다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오. 당신의 정성에 너무도 감격하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을 길이 없었소. 부디 그대는 인간 세상에 더 오래 머물다가 백 년 후 나와 함께 흙으로 돌아가시구려.”

최 씨가 대답하였다.

당신의 목숨은 아직도 한참 더 남아 있지만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에 이름이 실렸으니 이곳에 더 오래 머물 수가 없답니다. 만약 제가 굳이 인간 세상을 그리워하며 미련을 어 운명의 법도를 어기게 된다면 단지 저에게만 죄과가 미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누를 끼치 될 거예요. 다만 제 유해가 아무 곳에 흩어져 있으니 만약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면 그것이나 거두어 비바람과 햇볕 아래 그냥 나뒹굴지 않게 해 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다.

서방님, 부디 몸 건강히 지내세요.”

말을 마친 최 씨의 자취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김시습, 이생규장전

 

 

 

[해설]

김시습, 이생규장전

 

{해제}

한문으로 창작된 금오신화다섯 작품 중 하나로, 국문학사에서 의의가 매우 큰 소설 작품이다. 우리나라의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으며, 애정 전기 소설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잘 가지고 있다.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녀가 사랑을 성취해 가는 과정이 나타나고, 후반부에는 죽은 여자와 산 남자가 못다 한 사랑을 이어 가다 운명으로 인해 이별하는 과정이 나타난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진 가운데 결말의 비극성은 소외된 자의 고독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작가인 김시습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관련한 우의적인 해석도 주목해 볼 만하다.

 

{주제}

젊은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과 비극적 이별

{전체 줄거리}

고려 시대 송도(개성)에서 국학에 다니며 공부하던 이생이 귀족 집의 아름다운 처녀 최 씨를 보고 반하게 된다. 이생이 최 씨를 사모하는 마음을 시로 써서 최 씨 집 담 너머로 던진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밀회하고 연인이 된다. 하지만 이생의 아버지가 반대하여 두 사람은 이별하게 되고 최 씨는 이생을 그리워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이른다. 최 씨 부모의 간청에 의한 이생 아버지의 허락으로 결국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이생은 과거에 급제한다. 갑자기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이생은 피신하였지만 최 씨는 도적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난이 끝나고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져 홀로 지내던 이생에게 어느 날 최 씨의 환신(幻身)이 찾아와 두 사람은 못다 한 인연을 이어 간다. 3년이 지나 최 씨는 저승으로 가야만 하는 운명임을 말하고 이생과 또 다시 이별한다. 이생은 아내의 유언대로 장사를 지내고 홀로 살다가 자신도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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