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나에서 꾼 한여름 밤의 꿈
글·사진|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좁은 통로를 지나니, 역시나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마당이 나온다. 들어가는 통로 옆의 벽에는 인생의 사랑, 로맨스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쓴 낙서가 빽빽하다. 중정인 마당과 건물의 창가 또한 사랑을 찾는, 혹은 확인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연인들 사랑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인 '줄리엣의 집'의 풍경이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베로나의 유력 가문 몬태규가와 캐풀렛가 출신의 로미오(몬태규가 출신)와 줄리엣(캐풀렛가 출신)이 사랑에 빠지고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가문 사이에 칼부림이 발생하고, 둘은 비극적인 죽음에 이른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 베로나를 배경으로 쓴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을 누가 모르랴마는, '줄리엣의 집' 등 로미오와 줄리엣을 소재로 지나치게 관광화되어 있는 이 베로나라는 도시가 개인적으로 좀 마뜩잖았다. 그러던 중 몇 년 전 여름 시즌, 베로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축제가 100년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베로나의 오페라 축제가 궁금했다. 베네치아에서 레지오날레 기차를 잡아타고 이 자그마한 도시로 향했다. 결론은! 안 갔으면 후회했을 것이라는 점. 세상 모든 것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잘못된 선입견은 대부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더 일찍 찾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다. 베로나는 단순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가 아니라 로마시대의 아레나를 비롯해 다양한 역사가 층층이 쌓여있는 멋진 도시였다. 구 시가지에 자리잡은 2000년 전의 로마시대 아레나가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근사한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큰 목적인 오페라 공연 관람은 저녁인지라, 설렁설렁 줄리엣의 집으로 향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낙서로 가득찬 통로를 지나면 중정이 나오고 그 옆 건물이 줄리엣의 집이다. 사실 줄리엣의 집이 진짜 줄리엣의 집인지는 모른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한때 델 카펠로라는 가문의 소유였던 적이 있는데, 셰익스피어가 여기서 캐풀렛이라는 이름을 따왔을 거라고도 한다. 지금은 작은 박물관으로 변해 세상의 '아모르'를 꿈꾸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었다.
3층 발코니에서는 연인이 '진한' 키스로 사랑을 확인하고, 줄리엣 동상의 가슴을 터치하면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솔로' 관광객은 한 줄로 서 자신의 사랑을 기다린다.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의 한 장면처럼, 헤어진 연인이 울면서 편지를 쓰지는 않지만 편지와 낙서가 건물 곳곳을 메우고 있다. 게다가 동상 뒤의 벽에는 '진부하지만' 진한 핑크색 '사랑의 자물쇠'로 도배되어 있다. 이렇게 이곳은 연인들에게 가장 충만한 사랑의 확인처라고 오랫동안 선언하고 있었다. 이렇게 넘치는 '아모르'의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역시나 지나치게 관광지적인 풍경에 씁쓰레한 웃음이 입가에 떠오르긴 한다. 그렇지만 베로나에는 줄리엣의 집 외에도 줄리에타의 묘와 로미오의 집인 몬테키 저택 등이 있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필수 탐방코스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세속적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몽환적이고 드라마틱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림이 떠오른다. 약간은 과하다 싶은 그림의 분위기가 오히려 이곳과 어울릴 수도 있으려나. 바로 프랭크 딕시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영국의 사우샘프턴 시립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 속 화면에는 아마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장 유명한 장면일, 발코니로 올라온 로미오가 줄리엣을 만나 꿈같은 키스를 나누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프랭크 딕시(1853~1928)는 빅토리아 시기인 18세기 후반에 활약한 화가다. 그의 작품 속에는 18세기 중반부터 영국 로얄 아카데미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라파엘전파'의 분위기가 감돈다. 사실적이면서 환상적인 화풍에 문학이나 역사, 전설 속 드라마틱한 장면을 그림 속에 포착했다. 이러한 그림과 초상화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은 프랭크 딕시는 후에 기사작위에 오를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화가였다. <로미오와 줄리엣> 또한 그의 사실적이면서 환상적인 작풍이 잘 드러난다. 아름다운 저녁하늘과 저택의 풍경은 그들의 입맞춤을 더욱 로맨틱하게 만든다.
넘치는 '아모르' 외에도 베로나는 볼 곳들이 다양하다. 그렇게 큰 규모가 아니어서 둘러보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들지는 않는다. 에르베 광장의 시장은 베로나의 또다른 명소다. 흰 천막의 점포는 다양한 상품으로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이곳의 마돈나 분수와 그 옆의 높은 람베르티 탑 또한 조화로이 운치가 있다. 브라 광장 등 아레나 주변으로는 많은 카페와 음식점, 상점이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거리의 공연가들이 관광객의 눈길을 붙잡는다. 피에트라 다리에서 본 로마 극장은 흡사 신이 사는 올림푸스 산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뽐낼 정도로 베로나는 동화 속에서 보던 도시 같았다.
하이라이트인 오페라는 해가 지고 시작된다. 해가 지면서 아레나 주변으로는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찬다. 수트와 드레스로 격식을 갖춘 모습들을 보니 그들이 문화를 대하는 태도를 볼 수 있는 듯하다. 자연스레 예술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는 것 같아 보기 좋다. 허름한 여행자 복장이 약간은 부끄러워질 정도다. 공연장인 아레나는 서기 1세기에 지어진 로마시대의 원형극장이다. 길이 139미터, 넓이 110미터, 높이 30미터의 44열 대리석 계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극장이다.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니, 오늘날 웬만한 운동경기장보다 큰 듯하다. 이곳의 아레나는 로마의 콜로세움, 카푸아의 아레나 다음의 크기를 자랑한다고 한다.
표를 사고 돌계단에 자리를 잡는다. 야외라 그런지 시원한 바람이 머리 끝을 건드린다. 기분 좋은 느낌이다. 우리에게는 '춘희'로 알려진 <라 트라비아타>가 오늘의 라인업이다. 하늘 저 위의 달이 무대장치인 양, 시원한 여름 바람에 뒤섞여 들리는 청량한 배우들의 노래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생각보다 오케스트라의 음향과 성악가의 목소리가 뻥 뚫린 대기 속으로 죽죽 퍼진다. 부드럽고 장엄하다. 수천 년 된 아레나의 돌계단에 앉아 듣는 오페라는 정녕 색다른 느낌의 '한 여름밤의 꿈'이었다.
미술 저널리스트 류동현은 서울대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10여 년간 미술전문지
<아트>(현 <아트인컬쳐>), <월간미술> 기자로 일했고, ‘문화역서울 284’ 전시 큐레이터를 했다.
<인디아나 존스와 고고학>, <만지작만지작 DSLR 카메라로 사진찍기>,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공저), <서울 미술산책 가이드>(공저), <한국의 근대건축>(공저), <런던-기억>, <미술이 온다> 등의 저서와 공역서 <고고학의 모든 것>이 있다. 전시 <은밀하고 황홀하게展>과 <페스티벌284: 美親狂場>, <프로젝트284: 시간여행자의 시계>를 기획했고, 개인전 〈미술기자 Y씨의 뽕빨 111번展>을 열었다. 현재 미술 저널리스트 겸 전시기획자, 페도라프레스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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