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앞부분의 줄거리]
6·25 전쟁 당시 일곱 살이었던 수지는 가족들과 함께 피란길에 오른다. 수지는 여동생(오목)에게 항상 양보해야 하는 것이 싫어서, 오목이가 갖고 싶어 하던 은표주박을 주는 대신 고의로 오목이의 손을 놓는다. 전쟁이 끝나고 동생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수지는 어느 고아원에 오목이가 있음을 알고 가끔 찾아간다. 하지만 지난날의 잘못이 들통날 것을 염려하여 진실을 털어놓지 않는다. 오빠 수철도 오목이를 돕는 익명의 독지가로만 남는다.
수지와 수철은 아버지의 유산 덕분에 번듯하게 살아간다. 오빠 수철은 아내(영란)를 맞아 어엿한 중산층의 가장이 되고, 수지도 대학교까지 졸업한다. 한편 오목은 수지의 옛 애인인 인재와 만나는데, 수지는 질투심에 둘을 헤어지게 만든다. 결국, 오목이는 고아원 친구인 보일러공 일환과 결혼하여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이후 부유한 남자와 결혼한 수지는 2남 3녀의 부모가 된 일환과 오목이를 다시 만난다. 수지는 죄책감을 느껴 오목이에게 사실을 고백하려 하지만 끝내 하지 못한다. 수지는 죄책감을 씻는다는 생각으로 오복이의 남편이 중동 건설 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일환이 중동으로 떠나는 날 오목이는 결핵이 심해져 쓰러지고 만다. 수지는 오목이의 아이들을 같이 돌보자는 이야기를 하러 파티 중인 수철의 집에 방문한다.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과 동화될 수 없는 차이점은 이제 그녀 내부에 있었고 그건 근심이었다. 한 번도 근심이라곤 깃들어 보지 않은 것처럼 오로지 즐겁기만 한 사람들 속에서 그녀 혼자 크나큰 근심을 지니고 있었다.
수지는 오빠를 찾아온 게 바로 그 근심을 나누기 위해서였다는 걸 잊어버린 양 그 근심에 강한 애착을 느꼈다. 그 근심을 수철에게 나누어 준다는 건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라는 극단적인 격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속으로 허둥지둥 그녀의 근심을 부둥켜안았다. 자신이 품고 있는 근심에 대한 이런 돌발적인 애착은 근심 없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마음까지 불러일으켰다. 근심 없는 사람들이 허깨비처럼 텅 비어 보였다. 즐거운 파티도 사람들이 몽땅 비워 놓은 자리에 아름다운 비단과 현란한 보석과 이국적인 훈향과 감각적인 소문만이 한데 어울려 들끓고 있는 것처럼 헛되고 허전해 보였다.
너덧 패로 나누어져 있던 사람들이 여자 남자 두 패로 갈라져서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여자들 사이에선 지압이 과연 기적의 회춘 요법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고, 남자들은 그들이 현재 속한 신분보다 한층 높은 곳을 움직이는 인맥에 대해 아는 체하고 분석하느라 점차 목청이 높아졌다.
남자들의 화제는 단연 수철이, 여자들의 화제는 영란이 리드하고 있었다.
수지는 수철의 점잖고 정력적인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는 기억할까? 1951년의 겨울을. 그 겨울의 추위와 그 이상한 허기를.
그 생각은 수철이 낯설게 느껴질 때마다 수지에게 문득문득 떠오르던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늘 부정적이었다. 그에게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도 모르는 척할 것이라는 음흉한 의심까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수철을 자신에게 이로울 게 없는 기억에 대해선 얼마든지 시치미를 뗄 수 있는 위인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을 정말 잊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파티의 사람들을 보고 있는 사이에 수지는 수철이 그것을 정말 잊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수철이뿐 아니라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1951년의 겨울은 있지도 않았다는 걸 수지는 다소곳이 인정했다.
그 겨울은 결국 나만의 것이었어. 그 겨울이 없었던 사람하고 어찌 그 겨울의 죄과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던고.
<중략>
무언가 부족한 걸 발견하고 부엌 쪽으로 가던 영란이 한쪽 구석에서 갈비를 아귀아귀 뜯고 있는 수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멈춰 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지는 천천히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깨끗이 핥았다.
“고모,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고모답지 않게 그게 무슨 청승이에요, 창피하게시리……. 파티에 참석하고 싶으면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나와요. 내 옷 빌려줄 테니까 옷장에서 마음대로 골라 입어요. 참석하기 싫으면…….”
영란이 말끝을 흐리며 눈썹을 우아하게 찡그렸다.
“갈게요, 언니.”
수지는 오목이의 다섯 아이 중 둘이나 셋쯤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했던 자신의 마음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했다. 수철이가 맡는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떠맡아 양육할 사람은 영란인데 영란에게 그 아이들을 돌보게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중략>
“언니, 내가 언니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언니는 아마 모르고 있었을 거야. 고아원에서 처음 언니를 만났을 때부터 난 언니가 싫었어. 왜 그렇게 미웠는지, 아마 질투였나 봐. 언니 제발 용서해 줘. 일생에 누굴 그렇게 미워해 보긴 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난 미움받아 싸단다. 난 널 용서해 줄 자격도 없어. 아아, 내 죄를 네가 안다면…….”
“언니, 내 말 안 끝났어. 내 말 먼저 할 테야. 나에겐 시간이 없으니까. 근데 언니, 내 미움은 참 이상해. 내가 남을 내 마음처럼 믿고 의지하기도 언니가 처음이었으니. <중략> 참 이상해. 아무튼 자기가 죽은 후 자기 어린 자식들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누구를 믿는다는 건 동기간에도 여간 우애 있는 동기간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난 하필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한 언니에게 그런 걸 느낀 거야. 언니, 언니에게 힘든 짐을 지워 주려고 일부러 꾸민 얘기가 아냐. 꾸민 것처럼 이상한 얘기지만 정말이야. 자기 자식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만큼 남을 믿을 수 있다는 건 너무도 큰 은총이야. 언니, 정말 고마워. 언니에 대한 내 믿음과 사랑과 감사의 표시로 언니에게 이걸 주고 싶었어. 이건 내 전 재산이자 내 모든 거야. 내가 죽는 날까지 알기를 그렇게 원했지만 결국 못 알아내고 만 나의 정체까지도 아마 이 속에 포함되었을 거야. 내가 고아가 되기 전부터 내가 지녀 온 유일한 물건이거든. 난 이걸로 내 정체를 어떻게든 건져 올려 보려고 무진 애썼지만 허사였어. 아아, 내 아이들…….”
오목이가 천 근의 무게처럼 힘겹게 건네준 건 ‘은표주박’이었다. 은행알만 하고 청홍의 칠보 무늬가 아직도 영롱한 은노리개였다. 수지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공구해서 풀썩 바닥에 무릎을 꺾고 그것을 받았다. 어쩌면 수지가 지금 꺾은 것은 무릎이 아니라 이기로만 일관해 온 그녀의 삶의 축이었다. 마침내 그것을 꺾으니 한없이 겸허하고 편안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오목아, 아니 수인아, 넌 오목이가 아니라 수인이야. 내 동생 수인이야. 내가 버린 수인이야. 내가 너를 몇 번이나 버린 줄 아니……?”
이렇게 목멘 소리로 시작해서 길고 긴 참회를 끝냈을 때 수인이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러나 수지는 용서받은 것을 믿었다. 수인의 죽은 얼굴엔 남을 용서한 자만의 무한한 평화가 깃들어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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