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이조 판서 최명길이 헛기침으로 목청을 쓸어내렸다. 최명길의 어조는 차분했다.
“전하, 적의 문서는 비록 무도하나 신들을 성 밖으로 청하고 있으니 아마도 화친할 뜻이 있을 것이옵니다. 적병이 성을 멀리서 둘러싸고 서둘러 취하려 하지 않음도 화친의 뜻일 것으로 헤아리옵니다. 글을 닦아서 응답할 일은 아니로되 신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말길을 트게 하소서.”
예조 판서 김상헌이 손바닥으로 마루를 내리쳤다. 김상헌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화친이라 함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논할 수 있는 것이온데, 지금 적들이 대병을 몰아 이처럼 깊이 들어왔으니 화친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심양에서 예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도 없으니 화친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화친으로 적을 대하는 형식을 삼더라도 지킴으로써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화(和), 전(戰), 수(守)는 다르지 않사옵니다. 적의 문서를 군병들 앞에서 불살라 보여서 싸우고 지키려는 뜻을 밝히소서.”
최명길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판의 말은 말로써 옳으나 그 헤아림이 얕사옵니다. 화친을 형식으로 내세우면서 적이 성을 서둘러 취하지 않음은 성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뜻이온데, 앉아서 말라죽을 날을 기다릴 수는 없사옵니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아가 싸울 수 있겠사옵니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 더구나…….”
김상헌이 최명길의 말을 끊었다.
“이거 보시오, 이판.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이고,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이며, 화해할 수 없는 때 화해하는 것은 화가 아니라 항(降)이오. 아시겠소?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요?”
최명길은 김상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임금을 향해 말했다.
“예판이 화해할 수 있는 때와 화해할 수 없는 때를 말하고 또 성의 내실을 말하나, 아직 내실이 남아 있을 때가 화친의 때이옵니다. 성안이 다 마르고 시들면 어느 적이 스스로 무너질 상대와 화친을 도모하겠나이까.”
김상헌이 다시 손바닥으로 마루를 때렸다.
“이판의 말은 몽매하여 본말이 뒤집힌 것이옵니다. 전이 본(本)이고 화가 말(末)이며 수는 실(實)이옵니다. 그러므로 ㉢전이 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옵니다. 더구나 천도가 전하께 부응하고, 전하께서 실덕(失德)하신 일이 없으시며 또 이만한 성에 의지하고 있느니 반드시 싸우고 지켜서 회복할 길이 있을 것이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 최명길이 천천히 말했다.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 “어허, 그만들 하라. 그만들 해.”
최명길은 계속 말했다.
“전하, 그만할 일이 아니오니 신의 말을 막지 마옵소서. 장마가 지면 물이 한 골로 모이듯 말도 한곳으로 쏠리는 것입니다. 성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묘당의 말들은 이른바 대의로 쏠려서 사세를 돌보지 않으니, 대의를 말하는 목소리는 크고 사세를 살피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사세가 말과 맞지 않으면 산목숨이 어느 쪽을 좇아야 하겠습니까. 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 줄 아오나 상헌을 충렬의 반열에 올리시더라도 신의 뜻을 따라 주시옵소서.”
김상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묘당의 말들이 그동안 화친을 배척해 온 것은 말이 쏠린 것이 아니옵고 강토를 보전하고 군부를 지키려는 대의를 행해 공론이 아름답게 모인 것이옵니다. 뜻이 뚜렷하고 근본이 굳어야 사세를 살필 수 있을 것이온데, 명길이 저토록 조정의 의로운 공론을 업신여기고 종사를 호구(虎口)에 던지려 하니 명길이 과연 전하의 신하이옵니까?”
임금이 다시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쳤다. / “이러지들 마라. 그만하라지 않느냐.”
신료들은 입을 다물었다. 영의정 김류는 말없이 어두운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마 끝에서 고드름이 떨어져 내렸다. 성첩에서 다시 총소리가 두어 번 터졌다. 임금이 김류에게 물었다.
“영상은 어찌 말이 없는가?” / 김류가 이마를 마루에 대고 말했다.
“말을 하기에는 이판이나 예판의 자리가 편안할 것이옵니다. ㉤신은 참람하게도 체찰사의 직을 겸하여 군부를 총괄하고 있으니 소견이 있다 한들 어찌 전과 화의 일을 아뢸 수 있겠사옵니까.”
최명길이 말했다.
“영상의 말이 한가하여 태평연월인 듯하옵니다. 전하, 적들이 성을 깨뜨려서 덤벼들면 사세는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옵니다. 전하, ㉮늦추어야 할 일이 있고, ㉯당겨야 할 일이 있는 것이옵니다. 적의 공성을 늦추시고, 늦추시는 일을 당기옵소서.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우선 신들을 적진에 보내 말길을 열게 하소서.”
- 김훈, 「남한산성」
[해설]
{해제}
이 작품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청나라의 침입, 남한산성에서의 저항,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실존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사실성을 높이고 있다. 이 작품의 핵심적인 갈등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와 화친을 추장하는 주화파 사이에서 발생하지만, 그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인조의 내적 갈등도 잘 드러나있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로 당시의 상황과 인물의 처지를 실감 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주제}
병자호란의 치욕과 남한산성에서의 항쟁
{전체 줄거리}
1636년 12월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한다. 굶고 얼어 죽는 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조선의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성안에 넣는다. 남한산성 안에서는 청나라와 죽음을 불사한 전쟁을 주장하는 김상헌과 화해를 통해 평화를 주장하는 최명길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그 사이에서 인조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한다. 청과의 간헐적 전투가 지속되는 가운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고, 김상헌은 자결을 시도한다. 이듬해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고 많은 사람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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