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마음이 배바빠 아침도 덤비어 치우기는 하였으나 쓸데도 없는 호의에 걸음만이 더디다. 백 번 생각해도 그것은 실행할 일이 아닌 것을……
진고개 너머 어떤 일본 집에 수속 없이 제집처럼 들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정식 수속을 밟아 내쫓고 들어가게 해준다고 부디 오늘 오정 안으로 만나자는 친구가 있다. 집이 없어 한지에서 겨울을 날 생각을 하면 마음이 으쓱하다가도, 그러나 있는 사람을 내쫓고 들자는 생각을 하면 내쫓긴 사람이 역시 자기와 같은 운명에 놓여질 것이 아니 근심일 수 없다.
자기도 처음에 서울에 짐을 푼 것은 한지가 아니었다. 푸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일본 집 다다미방 한 간이 베풀어지는 호의를 힘입어 겨울을 나게 되었음은 다행이었다 할까. 해춘도 채 못미처 수속이 없다 나가라고 하여 쫓겨난 이후로 이래 아홉 달을 한지에서 산다. 남을 한지로 몰아내고 그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눈을 감을 염치가 없다. 이런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비로소 듣는 이야기가 아니요 받아보는 호의가 아니다. 일언에 거절을 하였더니,
"이 사람아, 고양이 쥐 생각두 푼수가 있지, 그런 맘 쓰다가는 이 세상에선 못 사네."
친구도 어리석은 생각임을 비웃는다.
㉠"그런 얌전만 피다가는 자넨 금년 겨울에 동사하네, 동사."
아닌 게 아니라 듣고 보니 그것이 만만히 될 것 같지도 않다.
<중략>
남대문 시장의 남미창정 어귀라고만 하여놓은 것이 하도 사람이 많고 뒤섞여 좀 해서는 찾을 수가 없다. 어른, 아이, 늙은이, 색시까지 뒤섞여 물건들을 안고 지고 밀치며 제치며 비비튼다. 같이 비비고 끼어들어 보니 안쪽 구석으로 낯익은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온다. 잠바 흥정이 붙었다. 친구는 양복 위에다 잠바를 입었다. 물건 주인은 값이 맞지 않는 모양으로 어서 벗으라고 잠바 앞섶을 한 손으로 붙들고 당긴다. 조금도 닳아진 맛이 없는 것 같은 스물다섯이 채 되었을까 한 청년이다.
"안 팔다니! 팔백 원이면 제 시센데 시세를 다 줘두 안 팔아? 이건 누굴 히야까시*루 가지구 나와서?"
친구는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팔을 뿌리친다.
"글쎄, 그르켄 못 팔아요. 이천 원 다 줘야 돼요."
청년의 손은 다시 잠바로 건너간다. 친구의 눈은 좀 더 매섭게 모로 빗기더니,
"받아요." / 지전 묶음을 청년의 호주머니 속에 억지로 넣어주고 돌아선다.
넣어준 돈을 청년은 다시 꺼내 부르쥐고 뒤를 쫓는다.
"여보!" / 친구의 옷자락을 붙든다.
"누구야! 왜 붙들어? 바쁜 사람을……"
"인줘요." / "주다니, 뭘 줘?"
"잠바 말이에요."
"당신 정신 있소? 물건을 팔구 돈까지 지갑에 넣구 다니다가 딴 생각을 허구선…… 이건 누굴 바지저고리만 다니는 줄 알아? 맘대루 물건을 팔았다 물렀다……"
몸부림을 쳐 청년의 붙든 손을 떨구고 떨어진 손을 와락 붙들어 이마빼기가 맞닿으리만치 정면으로 딱 당겨 세우고 눈을 흘기며 가슴을 밀어젖힌다.
㉡"이러단 좋지 못해, 괜히!"
밀어젖힌 대로 물러난 청년은 더 맞잡이를 할 용기를 잃는다. 멍하니 친구를 바라보고만 섰더니 어처구니없는 듯이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그대로 쥐고 있던 돈을 세어보고 집어넣는다.
무서운 판이었다. 총소리 없는 전쟁마당이다. 친구는 이 마당의 이러한 용사이었던가, 만나기조차 무서워진다. 여기 모여 웅성이는 이 많은 사람들은 다 그러한 소리 없는 총들을 마음속에 깊이들 지니고 있는 것일까. 빗맞을까 봐 곁이 바쁘다.
"아, 여 여보!"
어서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 자기를 찾는 듯이 살피는 친구를 꾹 찔러 부른다.
"지금 왔소?"
㉢"나 좀 바빠 먼저 가얄까 봐. 기다리겠기에 들렀지."
"바쁘긴. 내 다 아는걸…… 글쎄 그래가지군 백만 날 돌아다녀야 집 못 얻는달 밖에. 난 아직 아침도 못 먹구…… 우리 점심 같이 허구 잠깐 집에 들러 옷 좀 갈아 입구 나가세."
"아니, 정말 난……." / "글쎄, 이리 와요."
손목을 잡아끌어 앞세운다. 강박히 부딪칠 수가 없다.
점심이라기보다 술이었다. 실로 얼마만에 쇠고기찜을 실컷 하고 확확 다는 얼굴을 느끼며 남산 밑을 돌아 후암동으로 따라간다. 어느 커다란 회사의 중역이 살던 숙사인 듯 반 양식의 빨간 기와집이다.
㉣"이 집도 그렇게 얻었거든."
친구는 전령의 단추를 누른다.
꼭 같은 알몸으로 보퉁이 한 개씩을 등에 걸머진 채 인천에 내려서 헤어진 지 일 년, 친구의 살림은 벌써 틀이 잡혔다. 가구의 준비까지도 완비가 된 듯 장롱이니 의걸이니 놓아야 할 건 제대로 다 들여놓았는 데 놀랐다.
"팔백 원, 참 싸구나 ! 이건."
들고 온 잠바를 친구는 다다미 위에 내던진다.
"거긴 하루 한때만 들러두 밥벌인 되거든. 일자린 없것다, 쌀값은 비싸것다, 그대로 댕그라니들 앉아서 배겨날 장사가 있나. 전재민이 가지구 나오는 물건이 여간 많은 게 아니야. 늪지에서 자라난 풀대 모양으루 희멀쑥한 얼굴이 물건을 제대루 내놓지두 못허구 옆에다 끼구선 비실비실 주변으로만 도는 걸 붙들기만 허면 그건 그저 얻는 폭이지. 잠바도 만주 건가 봐. 가죽이니 좀 좋아? 작자가 어리숭해 가지구. 그래두 첫마디엔 안 놓아주구 제법 쫓아오던데? 글쎄 외투루부터 저구리, 바지 차례루 다들 팔아자시군 쪽 발가벗고들 눈이 멀뚱멀뚱하여 누워서 천정에 파리똥만 세구 있는 사람두 있대나? 하하, 자네도 이런 데 눈뜨지 않으면 파리똥 세게 되네, 괜히-"
㉤"파리똥두 집이 있어야 헤지, 난 별만 헤네."
- 계용묵, '별을 헨다'
히야까시:희롱, 놀림.
출전 계용묵, '별을 헨다'
주제 해방 공간에 있어서의 실향민의 고난과 지식인의 내면 풍경
해제 이 작품은 작가 계용묵이 전기에 보여 주었던 관조적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려는 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시대적 혼란 속에서 의분이나 정의감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은 혼란한 세태 속에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삶의 요령 따위를 부릴 줄 모르는 너무 양심이 바른 사람이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의 걱정을 먼저 하는 양심가라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결국 이 작품은 한 양심적인 지식인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전체 줄거리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을 맞자 아버지의 유골을 파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온 어머니와 주인공 '자기'는 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초막에서 지내고 있다. '자기'는 어떤 일본 집에 수속도 없이 들어가 사는 사람을 내쫓고 정식으로 수속을 밟아서 살게 해 주겠다는 친구를 만나러 나선다. 그 친구는 만주에서 나올 때 배 안에서 우연히 사귄 친구로 혼란 상황을 요령 있게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다. '자기'는 그 친구의 호의에 감사하지만 그것이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여 거절하자 그렇게 살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라는 핀잔만 듣는다. '자기'는 겨울을 넘길 방을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자 차라리 고향인 이북으로 가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담요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서 서울역으로 가 청단까지 가는 차표를 들고 서 있는데 고향 마을의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이북에서 이남으로 오는 길이라고 말하면서 이북은 살 곳이 못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남에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이남도 마찬가지라고 하니 실망을 한다. 고향 사람을 만난 끝에 어머니와 아들('자기')은 북으로 가도 시원찮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서성거리는 동안에 승객들은 다 빠져 나가고 대합실 안에 한기가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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