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지컬 미스터리투어] ② 여행자 이븐 바투타가 본 세계의 중심, 카이로
글, 사진| 원형준, 류동현
아라비아 세계의 위대한 여행자
이븐 바투타는 725년부터 지브롤터 해협 근처의 탕헤르에서 약
30년 간의 장대한 여정에 올랐다.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바그다드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돌아보았다. 고생스런 뱃길을 따라 노예 거래가 성행하던 잔지바르에 갔고,
썰매를 타고 칸의 얼어붙은 제국을 통과해서 사마르칸트에 이르렀다. 힌두쿠시 산맥에
올랐다가 갠지스 강 유역으로 내려갔고, 델리에 들어가서는 고위직 판관이 되었다. 이후 중국에 술탄의 칙사로써 방문했고, 황제를 만나러 가는 길에
차로 유명한 실론, 온종일 비가 내리는 수마트라,
부산스럽고 떠들썩한 항구도시 광둥에 들렀다. 이븐 바투타는 이렇게 온 세상을 구석구석
다닌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갔다(그는 서구 기독교도의 땅은 야만인들이 들끓는다고 여겨 발을 들이지
않았다).
문명이
끝나는 곳까지 이르고자 했던 그는 북으로는 옛 영광의 흔적만 남은 안달루시아, 남으로는 사하라 사막을
지나 황금이 솟아나는 팀벅투까지 돌아보았다. 그의 여정의 의미는 세계의 변방에서 시작해 중심부로
갔고, 다시 변방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한 모습과 여러 군주들과 사건에 대해 보고 느낀 바를
방대한 여행기로 남겼다는 데 있다. 또한 자신이 다닌 각 지역의 문화와 학문은 물론,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나누는 소통의 사절이었다. 20대에 시작한
여행이 50대에야 마무리되었으니, 청춘과 인생을 세계
여행에 바친 위대한 여행가다.
12만 킬로미터의
길고 긴 여정 중에도 여행가 이븐 바투타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한 번 걸었던 길은 두 번
가지 않는다는 것. 여행 내내 그 원칙은 지켜졌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최소한 다섯 차례 이상 들렀던 도시가 있었다. 당대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 최강국의 수도이면서,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는 무역과 순례의 행렬이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지리적 요충지였으니 당연했다.
카이로는 한 마디로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토록 많은 곳을 걸어온 이븐 바투타의 눈에도
그처럼 근사한 곳은 없었던 것이다.
카이로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지 8년 되는
해에 아무르 이븐 알 아스 장군이 이끄는 4천명의 아라비아의 기사들이 이집트를 정복(642년)하면서 시작됐다.
그들은 이곳을 함락하기 위해 바빌론 성 옆에 군사주둔지 푸스타트(‘천막’이라는 의미)를 건설해
7개월이나 포위 작전을 폈다. 이 도시만 함락한다면 이집트 전체를 수중에 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당대에 있던 바빌론 성은 이슬람교도들이 파괴했고 잔해만 남아있다). 이후 그 주둔지는 카이로라는 도시로 성장했다. 그때 아랍의
정복자들이 이슬람교를 들여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람의 모스크가 이집트의 도시들, 특히 카이로를 장식하게 된다. 그렇게 중세 시대의 카이로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더불어 아랍권
3대 도시가 되었다. 이후 14세기에 몽고가
침입하면서 두 도시는 파괴되었고 카이로만이 아랍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1천 4백 년의 역사를 온전히 보듬게 되었다.
카이로를 여행하는 방법은 먼저 남쪽의 올드 카이로를 보고 이슬람지구로 빠지는, 시대 순으로 둘러보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른바 시대흐름에
따른 도시 기행이다. 우리 나라로 따지면 암사동 신석기 유적을 둘러보고 삼국시대 몽촌토성에 오른 후
고려시대 원각사지 석탑의 탑골 공원을 갔다가 조선시대 경복궁을 들르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처럼
하나하나의 유적이 아니다. 이곳은 스케일부터가 다르다.
아예 하나의 지역이 그 시대를 대표한다. 압도적인 차이다.
우리도 먼저
올드 카이로로 향한다. 올드 카이로는 이슬람교에 의해 카이로가 건설되기 이전부터 형성된 지역으로 콥트
기독교도들이 모여있었다. 공중 교회, 유대인 교회, 성 조지 교회 외에도 콥트 박물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와
헤롯왕의 위협을 피해 도피 중 머물렀다는 장소 등이 있는 곳이다. 모스크와 미나레가 아닌 교회와
첨탑의 전경을 이집트에서 보고 있노라니 의외로 낯설다.
콥트 교회는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서기 1세기에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이후 이슬람교도에게 함락되기 전, 641년까지 이집트인
대다수가 기독교 신자였고 그리스어를 사용했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무척이나 낯설다. 서구의 기독교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동일하다고 믿는 양성론이라면 콥트 교는 예수의 신성만을 믿는
단성론이라는 것이 다르다(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콥트 교회는 이단으로 몰린다).
콥트 지구를
둘러본 뒤, 그 다음 시대를 향해 나아간다. 바로 이슬람
지구에 위치한, 십자군 시대에 축조된 성곽 시타델(Citadel)에 도착한다. 시타델은
12세기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중세 아랍세계의 영웅 살라딘이 수천명의 포로를 끌고 와 건설했다는
성채다. 성이라는 의미의 시타델(흔히 ‘살라딘의 성’으로 불린다.
아랍어로는 ‘칼라아’)은 약 7백 년 간, 19세기까지 정치의 중심지였다. 18세기 말에는 이집트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군대가 점령했고, 이후
영국의 식민지 군대가 70년 간 사용했다. 카이로의 아랍어
도시명에 ‘승리자’라는 의미가 있으니 카이로 시타델은
‘승리자의 성’이라는 의미도 지니게 된다.
시타델에는 크고 작은 미나렛과
궁전, 모스크뿐만 아니라 시장, 법원, 조폐소, 무기고,
감옥, 마구간 등이 있었으며,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거리ㆍ주택ㆍ상점ㆍ시장ㆍ공중목욕탕이 있는 주거지역으로 발전했다. 이곳에는 엄청난 숫자의
정실, 첩, 자식과 관료들이 살았는데 그 수가
통상 1200명을 넘었다. 그 밖에 투르크, 몽골, 슬라브 출신의
6천명이 넘는 노예들이 있었다. 14세기의 시타델 주방에서 만들어진 하루 음식
분량은 25톤에 이른다. 연회를 한번 하면 소 6백 마리, 말 5백
마리, 양 3천 마리를 잡았고, 후식을 만드는 데는 설탕 100톤이 필요했을 정도였다.
중세에
시타델을 찾은 유럽인들은 세상 어디에도 그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궁정은 없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르네상스가 태동하던 유럽이었지만, 아직까지 아랍의 부와 문명에 비할 바가 못 되었던
것일까. 1422년 술탄 바르스바이를 알현했던 피렌체의 외교사절 펠리체 브란카치가 남긴 흥미로운
경험에서 당시 시타델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 만남에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술탄의
무역 특혜 약속을 받아냈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 술탄의 처소 앞에 도착했다. 올라갈수록 경비병이 늘어났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삼지창을 든 경비병들이 머리 위에서 챙 소리를 내며 창을 맞부딪혔다. 그렇게 들어선 방은 마치 교회처럼 돌기둥으로 3개 회랑으로 나뉘어 있었다. 출입구와 마주보는 곳에 있는 무대에 술탄이 좌정하고 있었다. 흰 리넨 옷을 걸친 40세 정도의 남자로, 갈색 턱수염을 길렀다. 바로 뒤에는 병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검을 든 자, 물주전자를 든 자, 금화 통을 등이 보였다. 마치 옛 그림에 나오는 개선식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여기저기에서 비올, 레벡, 류트가 연주되었고 가수들이 이에 맞춰 노래했다.
나로 말하자면, 얼떨떨해져 한 걸음 뗄 때마다 바닥에 입을 맞추었던 기억 외에는 무엇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게다가 일행 모두에게 병사가 각각 2명씩 붙어서 어깨를 양쪽에서 움켜잡고 마치 마소 부리듯 끌고 갔다. 이들은 매번 아랍어로 바닥에 입을 맞추라고 귀가 먹먹해지도록 고함을 질렀다. 이런 식으로 바닥에 8차례쯤 입을 맞추었을 때, 술탄으로부터 5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멈추어 섰다. 병사들은 간단히 마치라고 윽박지르더니 알현이 진행되는 내내 우리 머리 위로 번쩍이는 도끼 3자루를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그러더니 통역관에게 채 몇 마디도 하기 전에 말을 자르며 “그만! 그만!”이라고 외쳤다. 우리는 다시 연신 바닥에 입을 맞추며 출입구까지 뒷걸음질쳐 갔다. 우리는 주군의 서한을 잠시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한 대신이 이를 잡아채어 읽더니 우리 면전에서 마구 불평을 늘어놓고, 급기야 우리 모두의 얼굴을 그 서한으로 찰싹 찰싹 때렸다. 모두들 유럽에서 온 사절단이 그처럼 뜨거운 환대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말해 주었다.”(맥스 로덴벡, 『카이로』에서)
시타델 경내에는 무함마드 알리가 지은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1833~1857년 완공)가 있다. 시타델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그 장엄한 규모와 분위기 덕분에 모스크가 마치 시타델의 대부분인양 착각
들 정도이다. 기자의 피라미드와 이집트 박물관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1811년 이집트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가 맘루크(Mamluk.
투르크 출신의 군벌 세력) 권세가 5백 여
명을 시타델 왕궁의 파티에 초대했다. 미리 매복한 병사들은 기관총을 난사해 일시에 그들을 모두
제거했다. 이를 계기로 장기 집권의 토대를 다지게 된 알리는 유럽식 군대를 만들고, 신품종 면화를 재배해 섬유업을 발전시켜 이집트의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존경받게 된다. 그가 1805년에 세운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마지막 왕
파루크는 1952년 나세르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물러날 때까지 150여 년간 지속되었다.
모스크의 정원에는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이 선물한 파란 시계탑이 있다.
자신이 세운 모스크 중심에 놓은 서구의 문물은 선진국을 닮고 싶었던 그의 바람을 드러낸다.
그런데 시계탑을 받기 2년 전 1845년에
알리는 프랑스 왕에게 오벨리스크를 선물했다. 현재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서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영웅 람세스 2세가 세운
룩소르 사원에 입구에 양쪽에 하나씩 있던 것을 주었기에 룩소르 사원에는 하나만 남아있다.
알리
모스크는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정식명은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를 모델로 삼았다. 블루 모스크가 비잔틴 제국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따라 한 것이니 그 뿌리는 비잔틴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방
41미터의 정방형 건물은 블루 모스크에 비해 작지만 그래도 6천 5백 명의 신도가 들어설 수 있어 결코 작다할 수만은 없다.
실내는 4개의
반원형 도움이 중앙의 큰 도움을 지지하는 구조이다. 블루 모스크처럼 거대 기둥이 도움 아래 있어서
하기아 소피아와 달리 공간이 탁 트인 느낌이 덜하다. 도움 아래에는 신, 예언자 무함마드, 4명의 칼리프의 이름이 씌어있는 수니파 이슬람
상징을 나타내는 원형 판이 걸려있다. 사실 모스크의 모습에는 애초에 알리를 이집트로 파견했던
본국, 오스만 투르크로부터의 독립의지가 깃들어 있다. 한낱
총독이었던 알리가 술탄(군주)만 세울 수 있다는 두 개의
뾰족한 미나렛(첨탑. 미나렛의 개수에 따라 권력자의 위세가
달라진다. 예컨대 6개의 미나렛이 있는 블루 모스크는 최고
권력자가 세운 것이다)과 여러 개의 도움이 중앙의 도움을 지지하는 구조의 모스크를 세운 것은 그가
술탄의 권력에 도전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모스크를 나와
성곽에 오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카이로는 19세기에 유럽
화가들이 매혹되었던 바로 그 풍경이다. 그 풍경은 오늘날에도 변함없다.
맑은 날에는 탁 트인 조망이 탄성을 자아낸다. 멀리는 뿌연 대기 사이로 피라미드가 고개를
내밀고 있고, 어렴풋이 나일 강과 사하라 사막, 야자나무
숲이 보인다. 성곽 주변에는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건물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 곳이 바로 카이로다.
원형준ㅣ원형준ㅣ미주리 주립대, 홍익대, 동국대에서 고고학과 미술사를 학부에서 박사과정까지 공부했고, 최근 건국대에서 박사과정(문화콘텐츠)을 수료했다. 홍익대•한양대 등에서 강의했고, 월간미술 기자, 일민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작은 미술관 여행>,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공저) 등이, 번역서로는 <이집트 미술>, <그리스 미술> 등이 있다. 현재 루비박스를 운영하면서, 미술과 문화콘텐츠 관련 글을 쓰고 강의한다. noxnaer@gmail.com
류동현ㅣ서울대 고고미술사 전공. <아트> <월간미술> 기자와 문화역서울 284 큐레이터를 거쳐현재 미술저널리스트 겸 전시기획자, 페도라프레스 편집장이다. fedorapress@naver.com[출처] 올댓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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