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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시대의 오페라, 현대적인 재해석인가 원작의 파괴인가?

사회, 문화 정보

by 배추왕 2018. 5. 9.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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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시대의 오페라, 현대적인 재해석인가 원작의 파괴인가?


레지테아터 오페라를 둘러싼 논란

글 | 장지영·공연 칼럼니스트

립오페라단과 서울시오페라단은 한국 오페라계를 대표하는 단체다. 두 단체가 올해의 첫 작품을 4월에 나란히 무대에 올렸다. 국립오페라단은 <마농>(4 5~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서울시오페라단은 <투란도트>(4 26~2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를 선보였다. 여기에 민간 오페라단을 중심으로 9회째를 맞는 대한민국오페라축제는 올해 라벨라 오페라단의 <가면무도회>(4 27~2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를 개막작으로 5 27일까지 한 달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세 프로덕션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하나같이 원작의 시·공간을 충실히 재현한 전통적인 무대 대신, 연출가의 해석에 따라 시대 배경과 분위기 등을 바꿨다는 점이다. 사실 전 세계 오페라계에서 연출가가 작품을 새롭게 만드는 레지테아터 대세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레지테아터(Regie-Theater)란 연출가가 시대와 배경 설정을 자유로이 바꿀 수 있는 연출가 중심의 무대를 말한다.

장수동이 연출한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 공연 장면 | 세종문화회관

이번 세 프로덕션 가운데 레지테아터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였다. 1926년 초연된 <투란도트>는 주세페 베르디를 이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왕좌에 오른 자코모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이다. 카를로 고치가 페르시아 민화집을 소재로 쓴 동명 우화극(1762) 바탕으로 했다.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는 한번 보면 마음을 뺏길 만큼 아름답지만 얼음처럼 차갑다. 과거 침략자들에게 능욕당했던 할머니의 복수를 위해 청혼하는 왕자들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맞히게 한다. 하나라도 틀리면 왕자의 목은 달아난다. 나라가 잃고 떠돌던 타타르 왕자 칼라프가 투란도트를 보고 청혼한다. 칼라프는 수수께끼를 모두 맞히지만 투란도트는 약속을 지키길 거부한다. 하지만 칼라프의 진심, 그리고 칼라프를 사랑하던 여종 류의 희생에 마음을 열게 된다.

배경은 중국 베이징으로 되어 있지만 <투란도트>는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실제로 공주의 이름인 투란도트가 페르시아어로 중앙아시아를 의미하는 투란의 딸이라는 것이나 시대적 배경을 전설의 시대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서양인의 눈에 구분이 안 되는 동양적인 요소들을 뒤섞은 작품인 셈이다. 일본을 배경으로 한 <나비부인>보다도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오리엔탈리즘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프랑코 제피렐리가 연출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의 <투란도트> | MET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초연 이후 <투란도트> 연출은 대체로 전통적인 중국풍 무대세트와 의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프로덕션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198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에서 프랑코 제피렐리 연출로 선보인 <투란도트>는 중국풍 스펙터클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립오페라단의 <투란도트>를 비롯, 그동안 선보였던 프로덕션에서 무대세트 디자인이나 규모 등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결같이 중국풍이었다. 2003년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공연된 장이머우 연출의 <투란도트>는 중국에서 자금성을 무대로 선보였던 프로덕션을 재현한 것이다.

2003년 도리스 되리가 연출한 베를린 슈타츠 오퍼의 <투란도트>(좌)와 2017년 스테파노 포다가 연출한 이탈리아 토리노 레지오 극장의 <투란도트> | 위키미디어 커먼스, 스페파노 포다 공식 홈페이지

그런데, 최근 해외에서는 중국풍 무대에서 탈피한 프로덕션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파니 핑크> 등으로 유명한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는 2003년 무대에 거대한 테디베어를 놓은 <투란도트>를 선보였다. 테디베어는 어린 시절 심리적 트라우마 때문에 정신적 성장이 멈춘 투란도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2015오페라계의 도살자로 불리는 칼리스토 비에이토가 북아일랜드 오페라에서 연출한 <투란도트>는 전체주의 치하의 플라스틱 인형 공장을 배경으로 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소비자 우선 정책에 따라 노동자들은 노예처럼 일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패러디했다. 그리고 국립오페라단에서 <보리스 고두노프> 등을 연출한 바 있는 스테파노 포다는 2017년 이탈리아 토리노 레지오 극장에서 초현실적인 미니멀한 무대를 선보였다. 연출, 무대세트 및 의상 디자인을 모두 하는 포다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수수께끼 같은 프로덕션을 선보였다.

장수동이 연출한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 공연 장면 | 세종문화회관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는 우리나라에서 전통 중국풍을 벗어난 첫 프로덕션으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했다. 연출가 장수동은 기계문명의 붕괴로 인한 대규모 환경 파괴 속에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지구촌 생존자들의 이야기로 바꿔놓았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 이후의 세계) 오페라를 표방한 이 작품은 기계문명이 붕괴한 미래 사회를 당인리 화력발전소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무대 세트로 표현했다.

이번 <투란도트>에서 장수동의 연출은 흥미로웠지만 세부적으로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문명의 붕괴로 기술적으로 퇴보했다고는 하지만,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도 의상이나 소품 등에는 아직 군데군데 전통적인 요소가 섞여 있었다. 게다가 배경만 바뀌었을 뿐 등장인물들은 전통적인 연출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미래적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뱅상 부사르가 연출한 국립오페라단의 <마농> | 국립오페라단

<투란도트>만큼 파격적이진 않지만 국립오페라단의 <마농>도 원작과 달라졌다. 오페라 <마농>19세기 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 쥘 마스네의 대표작으로 1884년 초연됐다. 아베 프레보의 소설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의 이야기(1731)를 바탕으로 두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비극적인 최후를 그렸다. 연출가 뱅상 부샤르는 원작소설의 시대배경인 18세기 대신 오페라가 초연된 19세기 말과 현대적 분위기를 독특하게 조합했다. 예를 들어 원작 소설 또는 오페라의 시작은 역마차가 오가는 아미엥의 여관이지만 부샤르는 기차역으로 바꿔놓았다. <가면무도회> 원래 17세기를 배경으로 했지만 라벨라 오페라단 프로덕션에선 상징적인 무대여서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을 확실히 알기 어렵다.


지테아터는 1930년대 독일 연극의 총아였던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가 창안했다. 라인하르트는 연출에 대해 단순히 텍스트를 무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성을 가진 하나의 예술'이라고 봤다. “죽은 작품을 무대의 살아있는 언어로 바꾸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연출이다. 즉 연출가는 희곡에 쓰인 대로 그를 재현하는 대신 새롭게 해석해 무대에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조명, 음악, 음향 등 시청각적 요소를 활용해 상상력 풍부한 무대를 선보인 그의 연출은 당시 평면적이고 무미건조한 자연주의 무대에 연극성을 부활시킴으로써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물론 당시에도 원작에 충실해야 한다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연극계에서 레시테아터는 점차 일반화됐다. 연출가들이 상상의 나래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데다 미니멀하고 상징적인 무대세트와 의상으로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리스 셰로가 197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연출한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중 '신들의 황혼'. | 위키미디어 커먼스
그런데, 오늘날 레지테아터 연출은 연극보다 오페라에서 자주 사용된다. 보수적인 오페라계에서 뒤늦게 레지테아터를 받아들이면서 연극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페라계의 첫 레지테아터 연출은 1976년 바그너 오페라 팬들의 성지인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에서 시작됐다. 엄밀히 말하면 그즈음 독일의 다른 오페라하우스에서 레지테아터라고 부를 수 있는 연출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니벨룽의 반지>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프로덕션이 큰 전환점이 됐다.

이 프로덕션의 연출을 맡은 프랑스 연출가 파트리스 셰로는 신과 영웅들이 등장하는 원작의 신화 세계를 공장 폐허와 철교 등이 등장하는 현대 도시의 변두리로 옮겨놓았다. 원작의 테마인 사랑과 권력을 현대인의 문제로서 제시한 것이다.

당시 100주년을 맞아 세계 음악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셰로의 파격적인 연출은 격렬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나 바그너의 후손들이 이어가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그동안 다른 오페라극장들보다 훨씬 전통을 고수하는 입장이었다. 일부 성악가의 경우 셰로의 연출에 동의할 수 없다며 연습을 앞두고 그만두기도 했다. 하지만 셰로 연출의 <니벨룽의 반지> 프로덕션은 오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이후 레지테아터 오페라가 퍼져나가는 출발점이 됐다. 당시 독일 오페라계에서는 연출가가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작품에 녹이는 스타일이 풍미했는데, 레지테아터야말로 이런 스타일을 구사하기에 용이했음은 물론이다.
조나단 밀러가 연출한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ENO)의 <리골레토> | ENO 공식 홈페이지
레지테아터 오페라는 독일어권에 이어 1982년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에서 조나단 밀러가 연출한 <리골레토>의 폭발적인 반향으로 전 세계에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원작의 배경인 중세 시대 만토바 궁정을 1950년대 뉴욕 마피아들의 술집으로 바꿨는데, 관객들에게 원작보다 훨씬 친근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오페라계에서 레지테아터의 유행은 연출가의 시대궤적을 같이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프로덕션의 중심이 지휘자나 성악가였다면 이제 연출가로 바뀐 것이다. 연출가들은 오페라를 새롭게 보여줄 수 있는 아이디어를 경쟁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로버트 카슨, 피터 셀러스, 페터 콘비츠니, 안드레이 서반, 마틴 쿠제이, 데이비드 맥비커, 칼릭스토 비에이토, 빌리 데커, 요시 빌러 등은 도발적인 레지테아터 연출로 유명하다.

이런 레지테아터의 유행은 오페라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에로티시즘과 폭력성이 증가했다. 작품의 의도를 극단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끄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과거엔 성악가의 가창력이 캐스팅의 절대적 요소였지만 점차 외모와 연기력도 중요한 요소가 됐다. 성악가들은 연출가의 의도에 맞춰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거나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됐다. 여자 성악가의 경우 최근 캐스팅을 위해 다이어트와 성형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카를로스 바그너가 연출한 국립오페라단의 <살로메>, 오페라《살로메》의 헤롯 왕의 의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캐리커처 | 국립오페라단

물론 일부 성악가들은 연출가의 과도한 요구 때문에 자신의 가창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거나 이미지에 타격이 간다며 출연을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 국립오페라단의 <살로메> 공연 당시 헤롯 역에 더블 캐스팅된 한국 테너 2명이 빨간 삼각팬티를 입으라는 베네수엘라 연출가 카를로스 바그너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며 개막 2주를 앞두고 사퇴하는 소동이 일었다. 당시 바그너는 삼각팬티는 헤롯 왕의 유아적이고, 안하무인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의상으로 타협할 수 없다 주장했고, 국립오페라단은 독일 테너를 긴급 섭외해야 했다.

하지만 유럽에선 오페라에 보조 연기자는 물론이고 주역 성악가가 반라 혹은 전라로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는 에로틱한 연출이 자주 나오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살로메가 춤을 추면서 베일을 벗는 일곱 베일의 춤 장면이 대표적이다. 나체가 되는 설정이라도 대부분의 소프라노들이 피부색의 레오타드를 입는다. 하지만 영국 로열오페라, 미국 MET, 북아일랜드 오페라 등에서는 소프라노들이 연출가들의 요구에 따라 실제로 나체 연기를 감행하기도 했다.


페라계에서 레지테아터에 대한 비난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폭력과 선정성이 지나치거나 설정 자체가 억지스러운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원작의 주제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에 대해 전통적인 팬들은 질색하기도 한다. 특히 극단적인 레지테아터 오페라에 대해 미국에서는 유로-트래쉬(유럽 쓰레기)’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며, 또 칼릭스토 비에이토 같은 연출가들에 대해선 오페라계의 도살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9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오프닝에서 유명 소설가 다니엘 켈만은 독일어권의 레지테아터 오페라를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켈만은 독일 공연계에선 레지테아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선 보수파라는 딱지를 붙이고, 역사를 재현하는 연출을 지시하면 반동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지적했다. 

이에 대해 레지테아터를 대표하는 페터 콘비츠니는 2010년 독일 라이프치히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심포지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작품 초연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것이 원작에 대한 충실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초연 당시로부터 컨텍스트(맥락)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출가의 역할은 원작과 관객의 중개자로서 작품에 내재하는 메시지를 현대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원작에 대한 충실함이다 주장했다. 즉 레지테아터와 원작에 대한 충실함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페라계에서 레지테아터를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결국 선택은 관객의 몫이다.

[출처] 올댓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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