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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우연히 만난 에콜드파리의 저주받은 화가들…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 샤임 수틴, 모리스 위트릴로

사회, 문화 정보

by 배추왕 2018. 3. 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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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우연히 만난 에콜드파리의 저주받은 화가들…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 샤임 수틴, 모리스 위트릴로

1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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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 연재]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②로마에서 우연히 만난 에콜드파리의 저주받은 화가들…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 샤임 수틴, 모리스 위트릴로

포폴로 광장으로 돌아와 인파 사이를 밀어젖히듯 헤치며 코르소 거리를 걷다가 지나던 길가에 붙어 있는 전시회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전시회 이름은 영어로 ‘The Exhibition Modigliani, Soutine and the Accursed Artists’라고 쓰여 있었다. 파리와 밀라노에서 대성공을 거둔 후 로마에서도 선보이게 된 순회전이라 했다. 여행 중에 이런 전시를 만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다.

전시장에는 평소 사랑해 마지않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와 샤임 수틴(1894~1943) 외에도 그들과 동시대에 활동하던 수잔 발라동(1865~1938), 모리스 위트릴로(1883~1955) 같은 화가들의 명품이 촘촘히 걸려 있었다. 모딜리아니의 불행한 애인으로만 알려진 잔 에뷔테른(1898~1920)의 작품도 두 점(한 캔버스의 앞뒤에 그린 작품) 포함되었다. 그 밖에도 지금껏 보지 못했던 유대계 화가들의 작품도 많이 출품된 전시였다.

내가 어렸을 적(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일본에서 조르주 루오(1871~1958)와 더불어 모딜리아니와 수틴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지금도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과 같은 주요 미술관에는 이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직접 보았던 일과, 그의 생애를 주제로 한 영화 몽파르나스의 등불을 본 것은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제라르 필립이 주연을 맡고 아누크 에메가 애인 잔 에뷔테른을, 리노 벤투라가 악덕 화상을 연기했던 몽파르나스의 등불1958년에 개봉된 프랑스 영화다. 일본에서도 같은 해 상영했다.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기 때문에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아마 중학교에 들어간 후, 텔레비전의 명화 극장같은 프로그램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고도 강렬하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는 모딜리아니를 보기 위해 일본 각지의 미술관을 질리지도 않고 다녔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푸른 옷을 입은 소녀」, 1918년, 개인 소장.


내가 가장 좋아한 작품은 푸른 옷을 입은 소녀. 모딜리아니는 아틀리에가 있던 몽파르나스 인근에 살던 가난한 아이들을 자주 그렸다. 그림 속 소녀의 표정은 아이다운 천진난만함보다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인생의 고난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긴장감을 품고 있다. 이 그림을 어디에서 보았는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교토시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였으리라 생각된다. 복제화를 사서 돌아와 오랫동안 집의 계단 위에 붙여 두었다. 어머니도, 여동생도 이 그림을 좋아했다. 노동으로 평생을 보내며 학교나 미술관과는 인연이 멀었던 어머니는 그림 속 소녀에게 특별한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머니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것은 한국에서 군사정권 시대가 한창이던 1980년의 일이다. 그 복제화도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잊은 지 오래다.

시대정신이라고 할까.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20년대 에콜 드 파리의 공기를 전해주는 모딜리아니와 수틴의 작품은 확실히 어딘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50~1960년대 일본 사회의 공기와 공명하고 있었다. 빈곤과 질병으로 스러져간 천재들의 작품이 전후 일본에서 동경의 대상이 된 까닭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현세적이고 실리적인 성공을 넘어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던 바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금 40대 이하의 많은 일본인들은 모딜리아니와 수틴에게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과거 30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사회 전체를 석권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마음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랬기에 로마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모딜리아니와 재회했던 나는 마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나 자신과 다시 만난 듯한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모딜리아니(왼쪽)와 잔 에뷔테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세파르디계(포르투갈과 스페인계) 유대인이다. 가업이 파산한 탓에 생계는 어려워졌지만 이해심 많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모딜리아니는 열네 살 때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훗날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결핵에 걸리고 만다. 19061월 파리로 이주하여 몽마르트르에서 활동을 시작한 모딜리아니는 파블로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드랭, 디에고 리베라 등과 교류했다. 1909년에는 몽파르나스로 이주하여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와도 만나게 되었다. 1915년 무렵부터 조각 작업을 그만두고 회화에 전념하면서 샤임 수틴, 모리스 위트릴로와도 교우 관계를 맺었고 1916년에는 폴란드인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와 친하게 지내며 전속 계약을 맺는다.

미술학교에서 알게 된 잔 에뷔테른과 동거를 시작한 것은 1917년부터였다. 이듬해 요양을 위해 니스로 떠났고, 1129일에 장녀 잔이 태어난다. 딸은 나중에 미술사 연구자가 되어 아버지의 평전 모딜리아니.인간과 신화를 집필했다. 모딜리아니는 19197월에 잔 에뷔테른과 정식으로 결혼하겠다는 서약을 했지만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1920124일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리운 이탈리아!”였다.

잔 에뷔테른 역시 모딜리아니가 죽고 난 이틀 후, 자택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임신 9개월의 몸이었다고 한다. 1920년 신문에는 모딜리아니의 죽음을 둘러싼 기사와 논평이 많이 등장하는데 시인 프란시스 카를로는 화가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빈곤과 고생, 부정으로 인한 진부함에서 도피하고 초월하려는 바람, 죄에 대한 갈망, 주도면밀한 무리들에게 비웃음의 씨앗이 되는 것조차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 그리고 이런 태도로 일관한 평생. 그런 것이 바로 예술가의 삶, 건곤일척의 생애다.”

잔의 가족이 유대인과의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야 함께 잠들 수 있었다. 꽤 오래 전에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를 찾은 적이 있다. 모딜리아니의 묘비명에는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고 한 순간, 죽음이 그를 데리고 가다.”라는 말이, 잔 에뷔테른의 비석에는 모든 것을 바친 헌신적인 반려라는 말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수틴의 초상」, 1917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시기는 달랐지만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수틴의 무덤을 찾은 적도 있다. 샤임 수틴은 1893년 제정 러시아의 민스크 근교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옷 수선으로 삶을 꾸려가던 아버지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형들도 유대인이 그림 따위를 그려서 뭐해!”라며 종종 때렸다고 한다. 1910년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있는 빌나 미술학교에 입학한 수틴은 19세가 된 1912년 프랑스혁명 기념일에 파리로 떠났다.

20세기 초반 1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는 다양한 이방인이 전 세계에서 모여들던 도시였다. 특히 근대화로 인해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파괴되었고 동시에 포그롬(반유대인 폭동)에 위협을 받았던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정통파 유대교도는 우상숭배 금지라는 계율 때문에 구상적인 미술 제작을 금기시했다. 그러나 샤갈(1887~1985)나의 회상에서 썼던 것처럼 그 무렵부터 유대계 화가들이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이주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에콜 드 파리의 유대계 미술가 중에는 샤갈 이외에도 모이즈 키슬링, 오시프 자드킨, 자크 립시츠, 그리고 수틴을 들 수 있다. 모딜리아니와 수틴은 열 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났지만 각별한 사이였다. 수틴과 모딜리아니, 여기에 위트릴로를 더한 세 화가는 에콜 드 파리에서도 유명한 술꾼들이었다.

모딜리아니는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친구인 화상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나는 자네에게 수틴이라는 천재를 남겨두고 갈 테니까.” 이후 미국인 미술품 수집가 알프레드 반즈에게 작품이 팔려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된 이후에도 수틴은 과묵하고 고독하며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굳어져 사교적인 면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 그리고 연인 게르다 그로스는 나치가 대두하자 독일에서 피신한 유대인이었다.
 

샤임 수틴, 「미친 여자」, 1920년경,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수틴 역시 일본에서 인기 있는 화가여서 각지의 미술관에 빼어난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우에노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이 소장 중인 새빨간 옷을 입은 여성을 그린 미친 여자는 특히 마음속에 간직해두고 있는 작품이다. 가능하면 해마다 학생들을 인솔해서 미술관을 찾아 이 그림을 보여주려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이렇게 격렬한 표현을 접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미술사학자들 중에는 모딜리아니가 좀 더 건강에 유의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다면 피카소와 샤갈처럼 오래 살면서 명성을 누리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지만 과연 그랬을까.

모딜리아니의 사망 이후 12년이 지나자 독일에서는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고 반유대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고국 이탈리아에서도 1938년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이 나치를 따라 인종법을 시행했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수틴과 그의 연인 게르다는 오세르 근교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프랑스 내무성이 적성敵性 외국인금족령을 내렸기 때문에 국적상 러시아인독일인이었던 두 사람은 그 마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후 게르다는 나치 독일에 점령된 남부 프랑스를 1940년부터 4년간 통치한 비시 정부에 의해 남프랑스의 캠프에 수용되었고 수틴은 다른 애인과 함께 프랑스 중부 지역 곳곳을 전전하다가 194389일에 천공성 위궤양으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포그롬의 기억과 나치즘의 악몽에 내몰린 결과가 가져온 죽음이었다.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장 콕토가 입회인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가 그때까지 살았더라도 수틴과 같은 운명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집요하고도 모진 운명의 발톱을 모딜리아니가 피해 갈 수 있었을까.
 

■저자_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도쿄케이자이대학東京經濟大學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인 서승과 인권운동가인 서준식의 동생으로 방북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던 형들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한 경력이 있다. 이 때의 장기적인 구호 활동의 경험은 이후의 사색과 문필 활동으로 연결되었으며 인권과 소수 민족을 주제로 한 강연 활동을 많이 펼쳐 왔다. 

저자는『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그 외에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분단을 살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의 사신』,『나의 서양 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등의 책을 썼다. 2006년 봄부터 성공회대 연구교수 자격으로 한국에 와서 장기체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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