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③겸손한 장인 정신으로 파시즘에 저항한 화가 조르조 모란디
대합실에 앉아 예전에 볼로냐에 왔던 때가 언제였는지
되돌아본다. 내가 이 도시에 마지막으로 내렸던 것은 2007년 12월이었다. 그때 볼로냐를 찾았던
가장 큰 이유는 조르조 모란디(1890~1964)였다. 모란디는 내가 은밀히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이다.
‘은밀히’라는 말을 쓴 까닭은 “이 점이 좋다.”라고 명확히
말하기가 쉽지 않고, 또 언제부터,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스스로도 확실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속에 자리 잡아버렸다, 이런 표현이
어울릴 법한 느낌을 주는 화가다.
세계 각지의 미술관을 돌아다녔던 젊은 시절에는 항상 그림엽서를 몇 장씩 사는 습관이
있었다. 도록은 무겁고 가격도 비싸서 정말로 좋은 전시가 아니면 선뜻 사기가
어렵다. 그 대신 마음에 들었던 작품의 그림엽서를 몇 장 사곤
했다. 그중에는 언제나 모란디가 슬그머니 끼어들어 있었다. 모란디의 작품은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
색채는 온후하고 담백하다. 모란디가 다루었던 제재는
풍경도 있지만 대체로 병이나 식기와 같이 정물이 많다. 명료한 기억과 맺어져
있지 않은 사물들. 너무나 자연스레 모란디는 늘 나의 곁에
있었다. 왜 그랬던 걸까?
내가 조금이라도 의식하면서 모란디의 작품을
보았던 것은 1990년 4월 교토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모란디
전」으로 기억한다. 동행했던
F에게 “모란디 좋아해?”라고 물었더니
“물론!”이라고 바로 답했다. “어디가
좋아?”라고 되묻자,
“무기적이지만, 유기적이니까.”라고 역시 즉답이 돌아왔다.
무기적이지만 유기적……. 과연
그렇다.
역에서 옛 왕궁과 볼로냐 대학으로 이어지는 인디펜덴차 거리는
양쪽을 낡은 주랑으로 꾸며 중세의 공기가 짙게 남아 있다. 그 길을 남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곧장 걸어간 지점에 시 청사인 코무날레 궁이
있고, 이 건물의 3층이 모란디 미술관이다. 이곳은
예전에 교황 사절의 거처로 사용됐다. 건물 외벽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의 희생자
2000명의 사진이 촘촘히 걸려 있다. 이탈리아의 거리를 걷다 보면 파시즘과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사이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 후, 2012년부터 모란디
미술관은 일시적으로 볼로냐 현대 미술관으로 이전했다. 또한 모란디가 오랫동안
아틀리에로 썼던 폰다차 거리에 있는 소박한 방 하나는 2009년부터
‘모란디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개방하고 있다.
2007년에는 두 곳 다 미완성이어서 가보지 못했다.
다시 청사로 들어가 3층까지 계단을 오르면 모란디가 ‘좋아하는 모델들’(그는 자신이
즐겨 그렸던 병과 항아리를 이렇게 불렀다)이 늘어서서
맞이해준다. 교황 권력의 위세를 보여주는 시 청사의 장려한 내부 장식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어울리지 않는 듯,
혹은 기묘하게 어울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볼로냐에서 태어난 조르조 모란디는 이 도시와 근교의 휴양지 그리차나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이탈리아 바깥으로 나간 적은 거의 없어서 1956년 파리 여행이 첫 번째 외국 방문이었다.
그는 볼로냐 폰다차 거리의 어둑어둑한 방에 틀어박혀 병과 항아리를 질리지도 않고 거듭 그리면서
지냈다.
1907년에 볼로냐의 미술학교에 입학해 1913년까지 그곳에서 그림을 배운 모란디는 특정한 화파에 속한 적이 없었다. 1914년부터 볼로냐의 초등학교 데생 교사가 되어 1929년까지 그 직장에 머물렀고,
1930년에는 볼로냐 미술학교의 판화 교수로 임명받아 1956년까지 근무했다. 미술사학자
로베르토 롱기는 1934년 볼로냐 대학에서 열린 강의에서 모란디를
“현존하는 이탈리아 최고 화가”로 평가했다. 1964년 고향
볼로냐에서 삶을 마친 모란디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 함께 살았던 세 명의 누이동생이 그를 돌보았다고 한다.
고전과 근대, 구상과
추상
그가 똑같은 병이나 항아리를 질리지도 않고 계속 그려낼 수 있었던
까닭은 병과 항아리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다. 병이나 항아리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모란디의 작품은 매우 구체적인
사물을 끊임없이 그려냄으로써 완성되는 비대상 회화, 요컨대 구상에 철저한
추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기적이지만 유기적인” 모란디는 고전적이지만 근대적이며,
구상적이지만 추상적인 화가다.
화가로 활동하던 초창기에 모란디는 미래파 운동과 접촉을 가졌다. 1914년 3월 볼로냐의
바리오니 호텔에서 하룻밤 동안만 열린 미래파 전시에 출품 작가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으로서 작품을 선보인 적도 있다. 그러나 미래파와의 접촉은 더 이상 없었다.
1909년 발표된
「미래파 선언」은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니케보다 아름답다.”라며 ‘속도의
미’를 찬미했다.
“우리들은 전쟁, 군국주의, 애국주의, 무정부주의의 파괴적인
행동,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이상, 그리고 여성 멸시를 찬미하고 싶다.”
「미래파 선언」 속에는 근대의 다이너미즘에 대한
예찬, 낡은 교권주의에 대한 반항,
그리고 파시즘으로 연결되는 파괴 충동이 혼란스레 뒤섞인 채 등장한다.
하지만 모란디의 미학은 ‘속도의
미’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었다.
그가 이 운동과 거리를 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926년과 1929년에는
밀라노에서 열린 「노베첸토 이탈리아노」 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무솔리니를 따르는 파시스트당이 로마 진군을 실행한 해가
1922년,
무솔리니가 ‘파시즘 독재 선언’을 한 것은 1925년의
일이다. 미술계에서는 무솔리니의 애인 마르게리타 사르파티가 파시즘을 지지하는
예술운동인 ‘노베첸토’를 전개했다. 이 운동의 목적은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전통, 특히 고대 로마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고전미술을
현대에 맞게 부흥시켜 파시즘의 애국주의에 기여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모란디도
당시 이탈리아 미술가를 휩쓴 이 운동을 피할 수 없었던 듯하다.
미술평론가 프란체스코 아르칸젤리는 이 시기의 모란디가 ‘부정형 형태의 극’에 경도되었다고
보았다. 아르칸젤리는 이것이 견고하고 명확한 형태를 이탈리아적인 이상으로
우러러봤던 예술운동인 노베첸토 미학에 대한 모란디만의 소극적이지만 근본적인 반항이었다고 보았다.
모란디가 명확한 정치사상의 언어로는 아닐지라도 미학적 실천의 언어로 파시즘에 저항했다는 말이다.
훌륭한
장인
1943년
5월 23일,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으로
인해 무솔리니가 퇴각하기 약 두 달 전쯤 모란디는 파시스트 당국에 체포되어 구치소로 이송됐다.
1942년 여름부터 볼로냐,
밀라노, 피렌체 등 각지에서 반파시즘
‘행동당’이
결성되었는데 모란디도 이 당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같은
혐의로 연행된 사람 가운데 조르조 바사니, 시인 아틸리오
베르톨루치, 훗날 모란디 평전을 쓰게 되는 미술사학자 아르칸젤리 등이
있었다.
결국 모란디는 6일 동안 구치소에 갇혔다가 친구들이 벌인 탄원 운동으로 석방되었다. 실제로 모란디는 행동당의 젊은이들과 단순한 친분이 있었을 뿐이었다. 다만 파시즘에 저항했던 젊은이들이 모두 모란디의 숭배자였고 볼로냐 대학에서 미술사 강좌를 열었던
로베르토 롱기의 제자였다. 롱기는 이후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렸다. 행동당의 젊은이들에게 모란디는 “모든 웅변이나 과잉, 격렬함과
천박함에 대립하는 존재, 파시스트적 신념이 전제로 하는 폭력적 사고와 정신적인
퇴락과 대립하는 그런 존재”로서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모란디는 반파시즘 사상가는 아니다. 실천가라고는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저 고난의 시대에, 10년을 하루처럼 병과
항아리를 계속 그려나갔던 ‘훌륭한 장인’으로서, 파시즘과는 양립할 수
없는 미적 실천을 관철해냈다.
그런데 ‘고전성’,
‘고요함’, ‘조화’, ‘엄격’과 같이 오늘날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모란디의 이미지에 관해 근래 들어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모란디에 대한 이런 이미지는 화가 자신이 적극적으로 의도함으로써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훌륭한 장인 모란디’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의 ‘작품’이었다면, 모란디를 찬탄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모란디는 세상의 여러 정치적 사건과 동향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피렌체와 베네치아,
로마와 밀라노의 중간에 위치한 볼로냐의 예술가다운 ‘선택’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시 청사를
나와 마졸레 광장 남쪽으로 걸으면 아르키진나시오 궁이라는 건물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옛 볼로냐 대학이 있다. 그곳에 들러 세계 최초로 인체 해부가 이루어졌다는 해부학 계단강의실을
구경했다. 현재 대학은 시내의 볼로냐 시립가극장 옆으로
이전했다. 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왼편 몬테그라파 거리에 위치한 다넬로라는
오래된 레스토랑에 갔다. 수백 년 전부터 영업을 했을 법한 레스토랑 지하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산지의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요리는 맛있었고 가격도
적당했다. 모란디는 금욕적인 수도사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거리 산책을
좋아했고 맛 좋은 음식과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 이 유서 깊은 식당에도 종종
찾아와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젊은이들’이 거리를 거닐다가 잠깐 들러 인사를 하면,
조용히 손을 흔들며 답했을지도 모른다.
■저자_서경식
[출처] 올댓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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