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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클라우드 시리즈 클림트 ③] 미국으로 넘어간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사회, 문화 정보

by 배추왕 2018. 4. 1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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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클라우드 시리즈 클림트 ③] 미국으로 넘어간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907Ⅰ캔버스에 금, 은, 유채Ⅰ138×138cmⅠ뉴욕 노이에 갤러리Ⅰ위키피디아. 〈키스〉와 함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이 작품은 클림트의 그림 중에서 가장 많은 금을 사용했다. 그림 속 아델레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몸은 마치 황금빛 장식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녕 아델레' 2006년 아델레의 초상이 빈을 떠나기 전 만들어진 공식 포스터.
클림트의 키스<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은 전 세계 사람들을 벨베데레미술관으로 불러 모았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찬란한 황금빛의 아델레 초상은 더 이상 벨베데레미술관에 없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불렸던 클림트의 대표작을 잃고 말았다. 2006, 아델레의 초상이 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가기 전 빈 시내 곳곳에는 아델레 안녕 CIAO ADELE’이라는 포스트가 걸렸고 마지막으로 아델레의 초상을 보기 위해 긴 줄이 이어졌다고 한다.
 
1907년 클림트의 황금빛 전성기에 그려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98년 아델레의 조카가 오스트리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하면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006년 아델라의 조카가 승소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고, 현재 그 그림은 경매를 통해 새로운 소유주가 된 글로벌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의 상속자가 경매가 14164천만 원으로 구입, 세상에서 가장 비싼 초상화가 되었. 빈 상류층 여인으로 유명 화가들의 후원자로 일생을 화려하게 살았던 그녀와는 달리 그녀의 초상화는 많은 풍파를 겪었다.
 영화 <우먼인 골드>의 스토리가 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초상>을 둘러싼 국제적인 분쟁의 전말은 클래식클라우드 시리즈 <클림트>에 매우 잘 나와 있다.

... 아델레의 의상을 가득 채운, 이집트 벽화 속의 눈처럼 보이는 문양들은 그 정교함과 세련됨으로 보는 이를 전율 속에 빠지게 만든다. 이 초상을 그릴 때 클림트는 마흔다섯이었다. 그는 남자로서, 그리고 한 예술가로서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림을 청탁한 이는 아델레의 남편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 Ferdinand Bloch-Bauer였다.
영화 <우먼인 골드> 중에서. 조카 마리아 알트만이 숙모에게 삼촌이 선물한 황금 목걸이를 끼워주고 있다.

… 블로흐-바우어 부부는 자녀를 얻지 못했다. 아델레는 1925년 세상을 떠나며 남편인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에게 자신의 재산 중 그림은 모두 오스트리아 정부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블로흐-바우어 부부는 아델레를 그린 두 점의 초상화를 비롯해서 다섯 점의 클림트 그림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나치스가 이 다섯 점을 모두 몰수했다. 종전 직후인 1945년 사망한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조카 세 사람에게 그림의 소유권을 넘겼다. 그중 한 명인 마리아 알트만은 나치스의 마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 1999, 73세가 된 마리아 알트만이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오스트리아 정부에 소송을 걸었다. 개인과 국가 간의,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아델레의 유언 자신의 그림을 정부에 기증한다을 근거 삼아 그림의 소유권이 오스트리아에 있다고 주장했으나 놀랍게도 국제사법 재판소는 이 그림의 주인은 그림의 모델인 아델레가 아니라 남편 페르디난트였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알트만의 손을 들어 주었다.

애당초 클림트에게 그림을 청탁한 이도, 그리고 그림 값을 지불한 이도 페르디난트였다는 것이 판결의 결정적 이유였다. 2006, 고별 전시 끝에 두 점의 아델레 초상을 비롯한 클림트의 그림 다섯 점은 벨베데레 미술관을 떠나 미국으로 옮겨졌다.

…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냈던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의 상속자 로널드 로더 Ronald Lauder는 13천500만 달러에 1907년 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을 사들였다. 그는 열네 살 때 이 그림을 처음 본 후, 매년 이 초상을 보기 위해 벨베데레 미술관을 찾았을 만큼 열렬한 클림트 애호가였다. 알트만은 그림을 판매하며 새로운 소유주는 그림을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현재 이 초상은 로더 가문의 미술관인 뉴욕 노이에 갤러리 Neue Gallery에 전시돼 있다. -<클림트> 中에서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Ⅱ> 1912Ⅰ아르테. 클림트가 그린 아델레의 두 번째 초상으로 나치스가 압수하기 전까지 빈의 블로흐-바우어 저택에 걸려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아델레의 조카에게 패소 이 그림 역시 빈을 떠났다. 2006년 11월 유명 여성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사들여 2014년 가을부터 약 2년간 뉴욕 현대미술관에 장기 임대했다. 이후 2016년 여,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개인 소장가가 다시 이 그림을 구입했다. 작품은 새로운 주인에게 넘어가기 전 뉴욕 노이에 갤러리에 일시적으로 전시되었고 현재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아델레는 성공한 은행가의 딸에서 열여덟 살이던 1899년 역시 성공한 사업가 페르디난트와 결혼했다. 35살의 페르디난트는 어린 아내가 소중했고, 자랑하고 싶었을 게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었던 페르디난트 그녀를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살롱의 안주인으로 만들었다.

클림트 <유디트 Ⅰ> 캔버스에 금, 유채Ⅰ84×42cmⅠ1901Ⅰ벨베데레미술관Ⅰ위키피디아. 클림트는 아델레를 모델로 세 점의 작품을 그렸다. 가장 먼저 그린 〈유디트〉는 이후 그린 두 점의 초상화와는 달리 관능적인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클림트는 가슴을 드러낸 채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그림 속 아델레의 모습이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보았는지도 모른다.
역시 살롱의 단골손님이자 당시 빈에서 최고 유명한 화가였던 클림트는 매우 도발적인 <유디트 >를 세상에 내놓았다. 홍조를 띤 볼과 유두, 반쯤 감은 눈과 반쯤 벌린 입술로 상반신을 거의 드러낸 <유디트 >는 빈의 사교계를 술렁이게 했다. 차가우리만치 창백한 아델레가 모델이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림 속 유디트는 페르디난트가 아델레에게 선물한 황금 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이었다.
 
아델레와 클림트는 단순히 후원자와 화가로, 살롱에서 만나는 사이였을까? 기혼자들의 연애에 의외로 관대한 빈 사교계였지만. 흥분된듯한 얼굴의 <유디트 >는 충분한 가십거리였다. 당시 클림트는 아틀리에에서 모델에게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게 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실제로 클림트의 아이를 낳은 모델도 여럿이었다. <유디트 >의 모델이 아내라는 사실을 모른 채 한 것인지는 몰라도 페르디난트의 아내 사랑은 변함없었다.
 
페르디난트는 클림트에게 아내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한 작품의 완성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클림트였지만 아델레의 초상은 클림트를 대표하는 온갖 장식으로 화면이 채워져 있어 더욱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4년이 꼬박 걸린 이 초상은 아델레의 얼굴보다는 그녀를 감싸고 있는 현란한 무늬의 드레스에 눈길이 가게 만든다. 클림트의 황금빛 작품 모두를 통틀어 가장 많은 금이 들어가기도 한 초상은 영원히 찬란하게 빛날 것처럼 눈부셨다. 페르디난트는 아내의 첫 번째 초상에 크게 만족하며 그림값으로 거금(4천 크라운으로 오스트리아 시골에 있는 저택을 살 수 있는 금액의 4분의 1 정도)을 지불했다.
영화 <우먼인 골드> 중에서. 블로흐-바우어 부부의 거실 중앙에 아델레의 초상이 걸려 있다.

… 관람객의 시선은 드레스와 배경을 메운 현란한 장식들에만 집중된다. 그림의 주인공이 아델레인데도 불구하고, 그림이 정작 보여주는 건 아델레라는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장밋빛인 그녀의 얼굴과 목에 비해 어깨 아래, 드레스에 감춰진 몸에서는 어떠한 양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화려한 장식들 속에 인형같이 아름다운 여자를 끼워 넣은 듯한 느낌, 어찌 보면 쇠사슬 같은 금속 장식들이 그녀를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옭아매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 황금과 고대 문양 속에 갇혀 있는 아내의 초상을 보고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는 크게 만족했다. 말 그대로 황금의 여자로 자신의 아내를 사람들에게 과시할 수 있었을뿐더러, 이 초상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능력도 자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대 최고의 화가 클림트의 작품을 통해 페르디난트는 예술 애호가로서의 위상도 한껏 높일 수 있었다. 어디로 보나 이 초상은 페르디난트와 아델레 부부의 살롱에 걸기 딱 맞는 그림이었다-<클림트> 中에서

클림트(왼쪽) <유디트 Ⅰ> 1901Ⅰ벨베데레미술관 (가운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907 Ⅰ노이에갤러리 Ⅰ아르테 (오른쪽) 서른 넷의 아델레 사진(1915). 위키피디아.
클림트 <키스> 1907~08 Ⅰ 벨베데레미술관Ⅰ아르테 .
초상화 속의 아델레는 유디트처럼 관능적이지는 않지만, 살짝 벌린 붉은 입술과 백옥 같은 목선 끝을 조이는, 유디트의 모델과 같은 황금빛 초커, 먼 곳을 바라보는 몽롱한 눈빛은 충분히 팜 파탈적이다. 클림트 전성기의 대표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키스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보는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키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클림트와 그의 연인 에밀리일까? 아델레와 클림트는 단순히 후원자와 화가일까? 연인일까? 클림트가 남긴 두 그림은 빈과 뉴욕에서 황금빛 찬란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을 증거하고 있다.

*<클림트>는 전문가 100인이 내 인생의 거장을 찾아 12개국 154개 도시로 떠나는 국내 최대 인문기행 프로젝트 클래식클라우드 시리즈 중 하나이다. 

▶ 전원경 작가  
연세대학교 졸업.  글래스고 대학교 문화콘텐츠 산업 박사. 월간 『객석』과 시사주간지 『주간동아』 기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런던 미술관 산책>과 신간 '클래식클라우드 시리즈' <클림트>가 있다.  




글Ⅰ올댓아트 에디터 김영남 · 자료&사진Ⅰ클래식클라우드 시리즈 <클림트> 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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